예술로 표상된 “삶의 형식”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I.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말한다. 실상 그가 말하는 “삶의 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이 개념을 명백히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형식을 정의하기란 어렵지만, 그럼에도 삶이란 초월적 형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물망처럼 엮어가는 어떤 문화적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주제는 언어이다. 그는 『철학적 탐구』에서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언어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들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말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언어”를 “예술”로 바꾸어 읽어도 유의미하다. 예술을 상상하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고, 예술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단순히 규정된 일치가 아니라 예술의 생산과 향유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가고 찾아가고 열어가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일치일 것이다. 김순임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다시 특별한 맥락에서 삶의 형식을 떠올린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을 통해 재현된 삶의 형식에서 소재의 선택에서 주제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미학적 특징들을 감지한다. 나는 이 글에서 짧게나마 그 특징들을 언급해 보려한다.
II. 최근 김순임이 인천아트플랫폼의 건물에 설치했던 <땅이 된 바다-굴 땅>은 삶의 형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바다라는 땅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예술적으로 표상하려는 시도가 한 눈에 파악되기 때문이다. 작품 제작과 과정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고 듣긴 했지만, 처음 얼핏 보기에 작품은 설치미술의 조형적 측면에서 볼 때 의외로 평범했다. 소재와 주제가 과도하게 연결된 듯도 하고 오브제의 활용에서 조형적 긴장감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의 초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작품들을 일별해 보노라면 김순임이 조형적 감각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설치작품에서 굳이 감각적인 요소를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나게 하고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둔다. 작품을 다시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과연 우리는 설치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실상 중요한 것은 삶을 어떻게 예술적 형식으로 표상해내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니체가 특히 그의 중, 후기 사유에서 강조하듯이,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삶이라는 등식을 그의 설치작품에서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III. 김순임은 조각에서 출발했지만, 지금까지 특정한 장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작업을 시도해왔다. 회화, 조각, 사진,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을 아우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어 온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형식으로서의 미학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추구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 여러 방식으로 전개된 그의 환경미술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그 본래적인 가능성의 자리에 예술은 놓여 있다. 그의 작업은 이를 확장된 예술의 놀이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IV. 실이 작업의 재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실상 실은 그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달리 말해 가능하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실은 하나의 기억을 또 다른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가고, 엮어가는 회상의 촉발체이다. 실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게 하릴없이 흩어질 것 같다는 그런 강박관념이 작업의 언저리에 놓여 있는 듯도 보인다. 그렇다면 실은 관계를 향한 욕망의 메타포라 보아도 될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한 가닥의 실은 사실 여러 가닥의 가는 실이 중첩되고 뒤틀려 꼬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실은 단지 관계를 지시하거나 또 암시하는 조형적 지표가 아니다. 실은 삶의 형식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조형적 긴장으로 이끌어내는 미학적 장치인 것이다.
V. 또 그의 작업에서 돌이 자주 등장한다. 자연에서 채집한 돌은 작가에 의해 기록되기도 한다. 이때 돌은 자연과 문화 사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원초적인 예술적 재료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실에 매달린 돌이나 바닥에 놓인 돌을 통해 작가가 굳이 어떤 내러티브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돌>이라고 명명하지만, 실상 돌은 날지도 않고 돌이 ‘나’, 곧 작가일 수도 없다. 돌은 그 자체로 의미의 현현이다. 실로 돌을 매달고 돌에 깃털을 덧붙이는 작업을 두고 돌의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술적 행위에 앞서 단지 그것이 돌임이 먼저 드러난다. 돌의 이름이 아니라 돌이 현전한다.
VI.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으로 보면, 김순임은 상당히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오해할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기본적이고 단단한 조형성에 충실한 작가이다. 다만 그 조형성을 삶의 형식으로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에 관심을 더 두기에 그의 작업은 감각적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뿐이다. 몇몇 작업에서 그가 여러 나라의 레지던시에서 생활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생활과 경험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국면을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여기가 아닌 저기로의 여행은 보다 확장된 예술을 미적으로 체험하려는 작가의 욕망이자 몸짓이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부질없는 또는 덧없는 흔적이다. 스쳐 지나가고 떠났던 그 모든 것은 다시 작업실로 귀환한다.
VII. 김순임은 문어발식으로(^^) 작업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이런 저런 작업을 마구 펼쳐 놓으면, 작가에게도 큰 부담이다. ‘이것이 김순임의 작업이다’라고 뚜렷이 부각시키기도 힘들 터이다. 그런데 그는 이를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열심히 둘러보고, 찾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작업이 그의 예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아마 나는 김순임을 삶의 형식을 구현하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조형적으로 세련된 힘을 제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왜 이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작업해야만 하는지를 묻고, 삶의 그 다양한 결들을 섬세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무엇보다 긴장의 미학으로 재현하려는 그의 시도는 작업을 그만 두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VIII. 예술을 사회적으로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가기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다. 예술은 주관적이며, 작가 개인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칸트 미학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듯이, 예술은 그 주관성 속에서 사회적이며 문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보편성 – 개념적으로 규정된 보편성이 아니라 반성적으로 열려있는 예술적 보편성 –을 지나쳐 갈 수 없다. 달리 말해, 가장 주관적인 예술은 사회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외면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짧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미학의 핵심을 묶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예술이란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에 긴장으로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표상하는 놀이라고. 나는 이 글에서 김순임의 작품에 나타난 조형적 특징 - 그가 발간한 두 권의 도록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을 상세하게 고찰하지 않았다. 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그의 작업이 바로 이러한 삶의 형식으로 표상되는 놀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놀이를 하는 작가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임성훈
성신여대 조교수(미학, 미술비평), 서울대 미학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석사(M.A.) 및 박사학위(Ph. D.) 취득. 주요 논문으로 「칸트 미학이 대중의 예술작품 감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오감의 미학과 소통」, 「예술은 철학이 되었는가?」, 「도시미화와 예술」,「 니체 미학에 나타난 숭고의 계기」,「미술과 공공성」,「환경미학」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