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임 작가론_사이를 구르던 돌멩이의 불온한 정주_채은영(미술이론)
2016-10-26 09:00:00

김순임 작가론

 

사이를 구르던 돌멩이의 불온한 정주

 

채은영(미술이론)

 

 

땅이 된 바다 : 굴 땅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이 었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은 스튜디오 동 앞 전실(前室) 근처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라디오와 전동 사다리 소리가 더운 공기를 채워가는 것을 대면했다. 초여름부터 스튜디오에서 철사에 무명실을 감고 굴껍질을 연결하며 작업 구상을 해온 작가의 야외 설치는 그렇게 20여 일 간 계속 되었다. 묵묵히 무명실을 철사에 감는 협업자들과 전동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작가의 모습은 체험 삶의 현장이나 극한 직업의 한 장면이었다.

 

이번 13번째 개인전 <땅이 된 바다 : 굴 땅 >(2016.8.26 - 10.30)은 인천 만석동 사람들의 생계 수단인 이 남긴 껍질들이 마치 콩나무나 덩굴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야외 설치 작업이다. 작가는 2015년 작은 미술관 개관 전시에 선보였던 전시장 작업을 야외로 확대하고 센서 조명등을 설치해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작업이 달리 보이는 방법을 시도했다. 오랜 고민과 노동의 과정을 지켜본 터라, 이번 전시 혹은 작업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겼는데 이러한 지점에서 향후 작가 행보의 전환을 짚어 보고자 한다.

 

설치가 진행된 인천아트플랫폼 야외혹은 ‘E동 앞 데크로 불리는 공간은 공식 명칭이 없는 장소다.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철제 빔으로 중간층이 연결되었고, 삼각 박공 지붕에 요란한 장식품으로 치장한 720*680*1250cm의 큰 아치같은 공간이다. 처음 작업 구상을 들었을 때, 하위주체의 표상으로써 굴껍질들이 과거와 현재가 짬뽕같은 개항장 문화지구 속 도시재생 레지던시 큰 길에서 거칠고 사납게 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분출되길 상상했다. 마치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다는 선언처럼... 하지만, 여러 현실적 문제로 인해, 이전 작업의 장점이었던 압도하는 스케일이 부족한 상태에서 아르 누보 같은 세부와 장식적 배치는 장소성과 소재가 가져야 할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안내 현수막조차 없었다면 작업은 인천아트플랫폼에 우후죽순 늘어선 여러 조형물 중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나의 야외 설치물을 개인전이라 하기엔 다소 모호한 상황에서 입주 작가들의 연계 전시가 열리는 전시장 한 자리에 작업 과정의 사진, 드로잉, 영상 작업이 선보였다. 9월 말 연계 전시가 끝난 이후엔, 그 어디에서도 작업 과정과 내용을 볼 수 없이, 한 달 여 간 설치 작업만 남겨져 있었다. 물론 작가는 작업이 온전히, 제대로 보여 질 수 없는 외부 조건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방법을 찾아 이번 전시를 치렀다. 이런 상황은 신진 혹은 젊은 작가이거나 중진 혹은 원로 작가 사이에 낀 40대 작가가 전시를 할 때 마주할 흔한 현실일 것이다.

 

공간과 장소 그리고 공동체 사이

 

작가는 평면, 사진, 설치를 매체로 이곳저곳에서 작업을 한다. 2006년부터 많은 레지던시에 일시 거주하고, 거의 매년 개인전을 하고 기획전에 참여하는 매우 부지런한 행보를 했다. 그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공동체와의 만남에서 작업을 만들며 새로운 장소성을 조우하고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최근 개인전이 ‘space-70’ 이란 부제를 갖는 것은 16여 년 동안 70여개의 공간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잠시 머물렀던 공간 속 공동체 삶에 개입하기 보단 최소한의 관계로 흔적을 남기고 그 과정에서 작은 의미를 서로가 갖기를 희망한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공동체를 초월한 자유인공동체 안에 내재하는 자유인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유인으로서 작가의 모습이다.

 

작가가 그 장소의 공동체에 갖는 배려의 거리두기는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흔들리지 않으려는 작가적 주체의 견고함과 동시에 공간과 작업의 기능적 관계가 생길 여지도 의미한다. 작업의 과정에 협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 과정의 처음과 마지막엔 오롯이 작가의 사유와 노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수행을 누군가는 삶의 형식이 예술로 표상되는 행복한 놀이라 하였지만, 관람객은 화이트 큐브나 야외 작업에서 매우 모범적인 조형성으로 꽉 찬 숭고함을 확인하거나 장소와 공동체가 지닐 맥락이 표본 오차 이내 알맞은 위치 짓기를 만날 수 있다.

 

예술에서 작가의 주관성과 자율성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예술이 갖는 사회적 의미로서 공동성과 관계 맺기 보단 예술가의 수행적 예술에 방점이 찍힐 때 작업이 가진 맥락이 섬세한 결들이 줄어 들 수 있다. 견고한 조형성과 오랜 과정 그리고 자연적 소재와 환경은 작가의 예민한 의도를 관념적으로 오해하게 한다. 작가가 만남이라고 이야기한 그 장소성과 공동체와의 관계는 우연이란 현대 미술의 알고리즘안에서 조우한다. 장소-특성적 작업이 프로젝트성격으로 반복되는 것은 작가가 가진 일정 단계의 역량과 총체에 대한 이해와 비평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불온한 정주

 

좋은 작가가 꾸준히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그런 작가들이 지속가능한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고민하게 되는 요즘이다. 작가는 지난 10여 년간 많은 레지던시와 연계되거나 별도의 야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최근 여러 방식으로 진행된 자연 속 작업들은 소수 미술계 혹은 관람객과 만나거나 무위자연적 예술의 미학 추구로 남을 수도 있으며 대부분 사진, 동영상, 드로잉으로 제한적으로 봐야 한다. 작가가 작업을 이해하고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모호한 대중적 소통보단 좁고 깊은 소통을 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돌아 다시 지금 여기가 작가의 자리라면, 이젠 작가에게 유목의 궤적이 공간 시리얼 넘버링을 해가는 행복한 놀이에서 다른 변종을 기대해보려 한다.

 

아는 작가의 작가론이 무척 부담스러웠던 요즘, 공간과 장소 그리고 공동체 사이를 유유자적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생각하며 운전하다, 라디오에서 롤링스톤즈 음악을 들었다. 1962년 결성된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는 록밴드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는 브티리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을 함께 주도한 댄디한 비틀즈와 달리 악동 이미지로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작가에게 믹 재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할거 같고, 다만 공간과 장소 사이를 구르는 돌멩이가 아니라, 그 사이를 가로지르거나 교란하는 조금 모난 짱돌이 되길 바라는 건 무리수 일까. 미적 체험으로써 유목이 아니라, 이제는 불온한 미적 실천으로써 어디엔가 정주하며 다른 공간과 장소 그 사이 공동체와 다른 조우를 경험한 후 작업은 어떤 실재로 드러날 것인가 상상하려니 무척 짜릿했다.

 

작가는 대단히 기본기가 있고 성실한 작가이다. 이것은 매우 귀한 자산이다. 현대미술 제도 안에서 작가가 특유의 예민함이나 못됨이 있거나 시각적 강렬함이나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만 드러내는 것이 만능은 아님에도 그렇지 않은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작업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하지만 작가가 자기-조직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은 오래 지치지 않고 좋은 작업을 하는데 가장 큰 힘이고 그런 작업들이 예술의 보편성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새로이 풍요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