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의 시학
구나연_미술평론가
미술은 선사 시대로부터 물리적 대상에 대한 문화적 ‘변형’의 역사를 갖는다. 변형이라는 것은 ‘만들다’라는 것이며, ‘만들다’라는 것은 인간의 범주 안으로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의식과 기원이라는 제의적 성격이 미술의 탄생과 긴밀히 관계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순임의 작업에 접근하기 위해서 선사 시대, 혹은 더 근본적인 시간과 공간의 미적 관념으로 거슬러가는 이유는 그의 작품에 내재하는 자연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미술의 범주에서 다루어지기 위해 변형되는 질료의 상태가 아닌 대상 자체가 삶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라고 말한다. ‘변형’의 과정 없이 자연의 대상이 드러내는 외적인 본질을 삶의 범주 안에서 그대로 인용하려는 이와 같은 태도는 그가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함축한다. 그는 하나의 장소나 자연 대상과 마주할 때, 그 공간과 대상이 겪었을 법한 일들을 깨우고, 작가 자신과 대상이 서로의 기억으로 각인되는 상호 관계를 엮어낸다. 이것은 그가 미술 이전의 대상을 미술 이후의 의식적 가치와 결합하는 행위이다. 물질로서 미술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서 탈피하고, 인위적 장소를 벗어나 유목과 우연과 같은 예측 불가능성을 포용하면서 대상과의 내적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Weaving>은 김순임의 이러한 결합과 탈피, 그리고 포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경우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웨스트 코스트 국립공원(West Cost National Park) 해변에서 이루어진 이 작업은 해안에 밀려든 해초로 행하여진 일종의 ‘꿰매기’(weaving)이다. 해변을 가로지르며 해초로 엮여 만든 무늬는 바다와 육지 사이를 잇는 홈질처럼 정연히 이어진다. 인공적 재료 없이 자연 소재만을 이용해 만들어 간 이 작업은 과거 대지미술이 제안했던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형식을 지니면서, 해안에 밀물이 들어오면 빠르게 사라지는 자연적 소멸의 멜랑콜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김순임의 소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순환이라는 순응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며, 이것은 곧 자연에 의한 회복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김순임이 장소와 마주하는 방식은 우선 외부 환경과 우연히 만나 하나의 특별한 장소를 지어내는 것이다. 이는 문득 마주친 공간으로 직접 들어가 그곳을 몸소 호흡하고, 그 장소의 자연물이 가진 시간과 기억을 가늠하며 그것을 조금씩 호출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땅, 돌, 풀, 모래와 같은 무명의 자연 대상들의 침묵과 작가의 신체나 행위가 생생히 증거하는 삶의 짖기가 밀착하는 공존의 상태이다.
예컨대 남아프리카 리치몬드(Richmond)에서 이루어진 그의 <The Seat of Water Ⅰ,Ⅱ>는 바위로 된 마른 땅 위에 흩어진 돌들로 작은 물길을 놓은 작업이다. 척박한 바위산 위에 돋아난 마른 풀들과 거친 돌들로 이루어진 이 행위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같은 공간 속에 이루어가는 관계의 합일이다. 이는 곧 작은 화해라고 할 수 있으며, 문명적 시공의 관념과 자연의 본질 사이에 이어진 매듭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순임은 미술가가 지니는 자율성과 문화적 위치를 머물고, 선택하고, 떠나는 행위자로 바꾸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관계맺음을 작업의 주요한 논리로 갖는다.
그러나 이와 달리 김순임이 장소와 마주하는 방식은 자연물을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이동시키기도 한다. 그가 무명의 한 장소 안에 잠시 기거했듯, 그가 선택한 자연 대상이 자신의 거주지(미술관) 안에 기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는 그가 여행 중 발견한 다양한 돌들 위에 그것과 마주친 날짜와 장소를 적어놓는다. “어디서”인가 “굴러먹던” 이 “돌멩이”들은 김순임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한 기억을 담은 대상이 되어 미술관 안으로 들어온다. 또한, 앞서 언급한 <Weaving>이나 <The Seat of Water>가 그 사라짐을 근본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진과 영상과 같은 기록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이 돌들은 작가의 유목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대상 자체로 자연에 향한 낭만적 심상을 환유하고 있다. 작가의 선택과 미술관이라는 개방적 미학의 전통을 연상시키면서도, 하찮은 자연물을 호명하고 그 가치를 호소하는 작가는 자연과 인간을 잇는 미적 행위의 매개자가 되는 것이다.
특히 김순임의 유목적인 장소 특정성, 그리고 자연물과의 우연한 만남과 선택은 자연의 순환적 논리를 그 밑바탕에 두고 있다. 시간에 의해 서서히 사라지는 대상, 그리고 조우가 일어나는 열린 공간은 크랙 오웬스가 장소 특정성에 대해 논하면서, 로버트 스미드슨의 작업이 마침내 자연에 순응하는 힘을 작품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 덧없음과 일시성의 상징은 결국 ‘죽음에 관한 상징물(memento mori)’라고 지적한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에 대한 경어는 종교적 의미의 것이 아닌, 작품이 경험하게 될 자연의 힘을 우리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결국 자연과 문명의 틈에 선 장소 특정적 미술은 작품을 통한 미적 체험이 아닌 작품 자체의 생존과 죽음을 추체험할 수 있는 관객의 성찰적 동요(動搖)에서 비롯된다. 미술관 안에서 기록물로 존재하는 유목의 여정은 이러한 성찰적 음향을 스스로 환기하는 결과를 지향하는 것이다.
<홈플러스 농장>는 마트에 놓인 매끈한 과일, 야채와 같이 현대의 삶이 소비하는 규격화된 자연물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중에 구입한 각종 청과는 그 씨앗을 파종하고 모종을 만들어 작가가 마련한 작은 하우스 농장에서 다시 자라나 각자의 잎과 열매를 맺는다. 대량 생산과 그 소비가 요구하는 자연의 규격화와 물질화에 대한 비판적 제스처를 담은 이 프로젝트는 교환가치를 지닌 일개 사물에서 근본적인 생명이 내재한 자연의 대상으로 변이하는 과정이다. 더욱이 이 변이 속에서 해충이 열매를 갉아먹고, 또 그 해충을 잡아먹는 벌레들이 들어오는 등, 작은 농원이 작은 정글로 변화하며 손상과 회복을 거듭하는 순환의 논리를 갖는다. 이는 재단된 도시의 삶이 도려낸 야생의 언어이자 죽음과 부활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근본적 원리를 드러내는 표본실의 진술이다.
따라서 김순임의 작업은 자연에 대해 문명이 벌이는, 패배를 전제로 한 줄다리기가 고조시키는 승리의 환각을 흐트러뜨린다. 생산의 논리 안에서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자연 대상의 형태를 원초적 맥락으로 되돌리는 이러한 행위는 비판적 저항의 성격을 자연적 순응이라는 역설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그가 오랜 바느질로 제작한 <The People 14 - Lee Ok-Lan>에서 시골 여성들의 가내 수공업이 상징하는 여성 문화의 성격을 한 늙은 여인의 조용한 잠으로 구현한 것과도 동일한 궤에 놓인다. 여성의 고된 바느질이 상징하는 젠더의 영역을 100살이 넘은 할머니의 누운 모습이 지닌 포용과 안식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결국, 그가 가진 자연에 대한 태도와 인간에 대한 시선은 목소리 없는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말 걸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개발의 논리로 폄훼된 자연적 본성을 독해하고 사회적 인식 속에서 탈락된 인물들을 회복시키는 의식이다.
김순임은 <땅이 된 바다 - 굴 땅>에 관해 “빈손으로 바다로 와서 땅을 짓고 집을 세워 가족을 지킨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정착해준 바다.”라고 말한다. 바다로 이주해, 바다가 내어준 만큼의 굴을 팔아 생존해 나간 사람들의 척박한 삶을 기리는 이 작품은 자연과 인간에 접근하는 그의 작업 방식을 그대로 투영한다. 우리는 그가 여러 장소에서 진행한 작업의 기록 영상을 보면서 수없이 이어지는 부단한 행위를 목격하게 된다. 몇 배속으로 진행되는 반복의 행위들, 햇빛이 변하고 비가 내리며 바람이 부는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그 원초적 ‘짓기’는 인간이 자연과 마주해왔던 척박한 삶의 ‘짓기’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 제안한 만큼을 거두고 지으며 살아가는 이 생태적 삶에 관한 시학들은 행위자이자 매개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에 대한 묵묵한 도전인 것이다.
(2017 인천아트플랫폼 비평삼일)